2009-05-29
Benjamin님 말씀하시길.
"그리하여 또 다른 형태의 침묵이 시작된다. 이를 우리는 자연의 가슴 아픈 애도라 부르자. 이는 형이상학적 진리다. 자연에 말을 부여한다면, 모든 자연은 소리 높여 탄식을 하리라 [...] 그 모든 애도 속에서 자연은 말이 없으려고 한다."
Walter Benjamin, Gesammelte Schriften Band II,I.S.
2009-05-20
지루함
나는야 지루해 죽을지경이다.
맹랑하게 떠돌아 다니는 말들도,
진부하게 그렇게 말할수밖에 없는 말들을 듣는것도,
아무 흥미없는그림들도,
어디선가 몇번이나 본듯한 이미지도,
모든것이 자기만의 것인냥 주장하는 모습도,
진부한 그림에 진부한 이야기만 해대는 상황도,
'태도'니 '내부'니 '내면'이니 어쩌니 하는 단어는 그 자체로 지루하기 짝이없다.
종이한장에 삼라만상 다 담은양 착각하는 상황도 우습다. 하지만 그것을 더 모호한 언어로 설명하려고 하는 강박에 시달리며, 결론적으로 '알수없음' 혹은 '설명하기 힘든 지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라는 무책임한 말로 덮어버리는 것이 더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것이다.
아무런 것도 흥미없으며 재미없으며 지루하다.
이 상태는 꽤 오래전부터 그래왔던것같은데 오늘에서야 확신이 든다.
지루해 죽을지경이다.
정말 재미없다.
무슨말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림이라는 것이 허무맹랑한 흥건한 자위의 흔적으로 밖에 인식되지않는다.
그들의 내면의 농밀한 이야기는 궁금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물론 나도 포함이다.
그림의 내부에는 무언가가 있다는데, '그 무언가'는 무언가?
너무거창해서 무릎이라도 꿇어야 될 지경이다.
차라리 캔버스 천, 나무, 혹은 종이 등 그 자체의 물질성 만으로 존재하는게 '그림'이라는 것의 솔직함일지도 모르겠다.
아, 정말 재미없다. 지루해죽겠다.
제일 큰 문제는 내가 하고있는 작업과 말이 이러한 조건을 가장 충실하게 충족시키고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순위권안에 들게 분명하다.
맹랑하게 떠돌아 다니는 말들도,
진부하게 그렇게 말할수밖에 없는 말들을 듣는것도,
아무 흥미없는그림들도,
어디선가 몇번이나 본듯한 이미지도,
모든것이 자기만의 것인냥 주장하는 모습도,
진부한 그림에 진부한 이야기만 해대는 상황도,
'태도'니 '내부'니 '내면'이니 어쩌니 하는 단어는 그 자체로 지루하기 짝이없다.
종이한장에 삼라만상 다 담은양 착각하는 상황도 우습다. 하지만 그것을 더 모호한 언어로 설명하려고 하는 강박에 시달리며, 결론적으로 '알수없음' 혹은 '설명하기 힘든 지점이 분명히 존재합니다'라는 무책임한 말로 덮어버리는 것이 더 황당한 시츄에이션인것이다.
아무런 것도 흥미없으며 재미없으며 지루하다.
이 상태는 꽤 오래전부터 그래왔던것같은데 오늘에서야 확신이 든다.
지루해 죽을지경이다.
정말 재미없다.
무슨말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그림이라는 것이 허무맹랑한 흥건한 자위의 흔적으로 밖에 인식되지않는다.
그들의 내면의 농밀한 이야기는 궁금하지도 않은데 말이다.
물론 나도 포함이다.
그림의 내부에는 무언가가 있다는데, '그 무언가'는 무언가?
너무거창해서 무릎이라도 꿇어야 될 지경이다.
차라리 캔버스 천, 나무, 혹은 종이 등 그 자체의 물질성 만으로 존재하는게 '그림'이라는 것의 솔직함일지도 모르겠다.
아, 정말 재미없다. 지루해죽겠다.
제일 큰 문제는 내가 하고있는 작업과 말이 이러한 조건을 가장 충실하게 충족시키고있다는 것이다.
아마도 순위권안에 들게 분명하다.
2009-05-19
2009-05-16
the fancy image of the fancy conception

fancy와 kitsch의 미묘한 신경전 혹은 줄다리기는 매우 즐겁다.
그래서 저기 뒷면에 dear-, 열줄정도 긋고, from- 따위를 써넣으면 삼만원받아도 될까.
거듭 강조하지만 봉투도 만들수있는데말이지....
(click to enlarge 입니다.)
2009-05-15
계단
만들기에서항상 예상 내지는 통제를 벗어나는 것이 있는데
바로 계단.
많은 조각들은 기계처럼 동일한 크기로 잘라내고 연결하는 작업이
크기, 노력 여하, 혹은 방법에 따라 그 오차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산술적 계산과 일치하기란
우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하겠다.
명백하게 그 이유는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한 변수가 너무 많은 것인데
계단의 폭과 높이 구성하는 재료들의 크기,접착제의 두께,
부분 재료들이 만나는 각도 등등
실제로 사람이 이용하는 계단을 처음 만들어보니
더 영리하게 설계된 도구들을 이용하지만서도
손으로 재고, 그리고, 잘라서 만드는 이상
오차가 없을 수는 없다.
물론 오차를 만드는 변인들은 달라지지만
변수가 3개 이상이 되면
평범한 인간의 두뇌로는 통제가 어려운듯하다.
기계를 이용해 만든 재료를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사람이 쉽게 인지할 수 없는 범위내의 오차로
많은 변수들은 통제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오차를 알기 어려울 뿐이지
오차가 없다 할 수는 없다.
제작과정에서 미세한 변수들이 또한 많이 작용하고
기계 자체에 오차가 전혀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싯적에 항상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는
'자를 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기계가 있는가?'였는데,
예를 들어, 직각자를 만드는 기계는 정확한 직각을 내재하고 있다면
과연 그 기계를 만들때 직각은 어떻게 맞추느냐가 의문이었다.
길이, 시간 등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표준이 있기 때문에
그 기준을 따르면 된다 하겠지만,
직각이란 것은 수학적으로 정의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한치의 오차없이 지각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요즘에 오차를 줄이는 일이란
더이상 줄이나 안줄이나 알 수 없는 지경이다.
하지만 그 오차는
0으로 끝없이 수렴하는 무한급수와 같아서
0이라 치자 할 수는 있지만
결코 0이다 할 수는 없는 슬픈 운명같이 느껴진다.
오늘의 계단 제작이 성공적이었다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 느슨한 과정에서 없던 아이디어들이 꺼내져 만들어졌다는 것. bricoleur.
설계도와는 조금 달라진 오늘의 계단이
설계상의 계단보다 나아보이는 것은 애착일 뿐이겠지만.
어차피 달라질 계단.
바로 계단.
많은 조각들은 기계처럼 동일한 크기로 잘라내고 연결하는 작업이
크기, 노력 여하, 혹은 방법에 따라 그 오차의 차이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산술적 계산과 일치하기란
우연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 하겠다.
명백하게 그 이유는 완벽한 통제가 불가능한 변수가 너무 많은 것인데
계단의 폭과 높이 구성하는 재료들의 크기,접착제의 두께,
부분 재료들이 만나는 각도 등등
실제로 사람이 이용하는 계단을 처음 만들어보니
더 영리하게 설계된 도구들을 이용하지만서도
손으로 재고, 그리고, 잘라서 만드는 이상
오차가 없을 수는 없다.
물론 오차를 만드는 변인들은 달라지지만
변수가 3개 이상이 되면
평범한 인간의 두뇌로는 통제가 어려운듯하다.
기계를 이용해 만든 재료를 사용한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사람이 쉽게 인지할 수 없는 범위내의 오차로
많은 변수들은 통제가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 방법 역시 오차를 알기 어려울 뿐이지
오차가 없다 할 수는 없다.
제작과정에서 미세한 변수들이 또한 많이 작용하고
기계 자체에 오차가 전혀 없다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소싯적에 항상 궁금했던 것 중에 하나는
'자를 만드는 기계를 만드는 기계가 있는가?'였는데,
예를 들어, 직각자를 만드는 기계는 정확한 직각을 내재하고 있다면
과연 그 기계를 만들때 직각은 어떻게 맞추느냐가 의문이었다.
길이, 시간 등은 기본적으로 인간이 만든 표준이 있기 때문에
그 기준을 따르면 된다 하겠지만,
직각이란 것은 수학적으로 정의된 것이기 때문에
현실에서 한치의 오차없이 지각을 재현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요즘에 오차를 줄이는 일이란
더이상 줄이나 안줄이나 알 수 없는 지경이다.
하지만 그 오차는
0으로 끝없이 수렴하는 무한급수와 같아서
0이라 치자 할 수는 있지만
결코 0이다 할 수는 없는 슬픈 운명같이 느껴진다.
오늘의 계단 제작이 성공적이었다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은
그 느슨한 과정에서 없던 아이디어들이 꺼내져 만들어졌다는 것. bricoleur.
설계도와는 조금 달라진 오늘의 계단이
설계상의 계단보다 나아보이는 것은 애착일 뿐이겠지만.
어차피 달라질 계단.
2009-05-13
진짜
시각예술이 시각으로 통해서 모든 것을 전달한다면
건축은 시각예술이 될 수 없다.
사람의 인지 감각중 가장 빨리 피로를 느끼는 부분은 시각이다. 눈의 초점이 한 점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대단히 짧고 그 후에는 동일한 장면은 인지할 수 없다. 때문에 사람이 한곳을 주시하고 있다 느낄 때에도 사실 눈의 초점은 목표 지점의 미세한 부분부분을 끊임없이 맴돈다. 너무 강한 자극을 지속적으로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인가.
시각 예술은 관람자에게 시지각적 경이이고 장관이다.
많은 것을 환기시키지만 구현하지 않는다.
건축이 시각 예술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강력한 찰나의 자극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둔하디둔한 덩어리이다.
현재의 다수가 칭송하는 한켠의 건축이란 장인이 없는 시각 예술이다.
시지각적 자극에 머물러 경험을 구현하지 않고 재현한다.
감히 현혹이라 하겠다.
삶을 영위하는 공간은 시각적 자극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쩌면 시간의 누적, 반복적 경험은 시각을 심상의 일부로 전환시킨다.
이때에 시각적 심상은 다른 심상들을 재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공간에 의한 행위의 구현은 생활이라는 실체를 만들어내고
그 누적은 삶이라는 실존을 구체화한다.
그런데
진짜란 뭘까.
건축은 시각예술이 될 수 없다.
사람의 인지 감각중 가장 빨리 피로를 느끼는 부분은 시각이다. 눈의 초점이 한 점에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대단히 짧고 그 후에는 동일한 장면은 인지할 수 없다. 때문에 사람이 한곳을 주시하고 있다 느낄 때에도 사실 눈의 초점은 목표 지점의 미세한 부분부분을 끊임없이 맴돈다. 너무 강한 자극을 지속적으로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인가.
시각 예술은 관람자에게 시지각적 경이이고 장관이다.
많은 것을 환기시키지만 구현하지 않는다.
건축이 시각 예술이 되지 못하는 이유는
시각으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간결하고 강력한 찰나의 자극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기에는
둔하디둔한 덩어리이다.
현재의 다수가 칭송하는 한켠의 건축이란 장인이 없는 시각 예술이다.
시지각적 자극에 머물러 경험을 구현하지 않고 재현한다.
감히 현혹이라 하겠다.
삶을 영위하는 공간은 시각적 자극에 머무르지 않는다.
어쩌면 시간의 누적, 반복적 경험은 시각을 심상의 일부로 전환시킨다.
이때에 시각적 심상은 다른 심상들을 재현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공간에 의한 행위의 구현은 생활이라는 실체를 만들어내고
그 누적은 삶이라는 실존을 구체화한다.
그런데
진짜란 뭘까.